JINJU.KR · ARCHIVE
진주.kr 전체 글
일상, 관계, 마음, 책에 관한 공개 의견을 최신순으로 모았어요. 새 글은 검색 공개 유예 시간이 지난 뒤 이 목록에 표시됩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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공연장 문 앞에서 함께 기다린 사람
공연 중 기침이 나서 잠깐 밖으로 나왔는데, 잦아든 뒤에도 언제 들어가야 할지 몰라 문 앞에 서 있었어요. 안내원이 다음 입장 신호가 오면 같이 가자며 조금 떨어진 곳에서 기다려줬어요.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는 말 덕분에 문손잡이만 보던 눈을 들고 남은 음악을 기다릴 수 있었어요.
일상 ·
계란 껍데기만 그릇에 모신 아침
계란을 깨다가 속은 버릴 그릇에 털고 껍데기만 반죽 그릇에 얌전히 넣었어요. 숟가락을 들고 나서야 오늘 준비한 것이 아침밥이 아니라 껍데기 전시회라는 걸 알았네요. 버린 계란은 다시 쓰지 않고 치운 뒤 손을 씻고, 새 그릇부터 천천히 꺼냈어요.
일상 ·
같이 만든 저녁에 감독은 한 명 줄었어요
친구와 저녁을 만들면서 양파를 조금만 더 얇게 썰어달라고 두 번이나 말했어요. 친구가 그럼 네가 썰겠느냐고 칼을 내려놓자, 같이 하자고 불러놓고 제 방식만 시키고 있었구나 싶었어요. 꼭 필요한 크기만 함께 정한 뒤 저는 밥을 맡았고, 모양이 제각각인 양파도 저녁에 잘 어울렸어요.
관계 ·
내가 추천한 식당이 별로였다면
좋아하는 식당에 친구를 데려갔는데 소스가 좀 달다는 말에 괜히 메뉴 설명을 길게 했어요. 집에 와 생각해보니 친구는 음식 맛을 말했는데 저는 제 취향이 틀렸다는 말처럼 들었더라고요. 다음에는 단맛이 아쉬웠는지만 묻고, 친구가 좋아하는 메뉴도 하나 골라보려 해요.
관계 ·
요리 전에 기다리는 시간부터 읽었습니다
저녁 준비를 하며 채소를 다 썰고 나서야 조리법 중간의 ‘삼십 분 불려두기’를 발견했어요. 다음 요리 때는 첫 재료를 꺼내기 전에 조리법을 끝까지 훑고 불리기와 식히기에 걸리는 시간부터 표시했어요. 손질 시간만 세던 제 저녁 계획에 가만히 기다리는 시간도 들어왔네요.
일상 ·
지퍼에 낀 안감 앞에서는 힘을 뺐어요
재킷 지퍼가 배쯤에서 멈춰 힘껏 올리려는데 안감 한 귀퉁이가 같이 끌려 올라왔어요. 옷을 벗어 어디가 끼었는지 확인하고, 천을 조금씩 빼면서 지퍼를 왔던 쪽으로 천천히 되돌렸어요. 이번에는 풀렸지만 더 단단히 걸렸다면 손을 멈추고 수선집에 맡겼을 거예요.
일상 ·
우주 식물 실험에 질문을 하나 보태봅시다
오늘 시작하는 세계 우주 주간 소식을 읽다가, 최근 발사된 크루 13의 연구 목록에서 식물 재배 실험에 눈이 갔어요. 대부분 자동으로 작동하는 새 재배 장치와 전용 시설 밖에서 식물을 키우는 실험을 한다니, 저는 물을 어떻게 줄지가 가장 궁금해요. 우주에 가져갈 질문을 하나만 고른다면 여러분은 빛, 물, 뿌리 중 어디부터 살펴보고 싶나요?
일상 ·
서문이 한 약속을 결말에 물었습니다
논픽션을 읽은 뒤 서문에서 저자가 풀겠다고 한 질문을 각자 한 문장으로 정리했어요. 마지막 장이 그 질문에 어디까지 답했는지 근거가 되는 대목과 끝내 남은 빈칸을 나눠 적었어요. 책의 만족도를 먼저 말하기보다 처음 건넨 약속과 마지막 답 사이의 거리를 재봤어요.
일상 ·
결정 직전에 책을 덮는다면
북클럽에서 주인공이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 직전 모두 책을 덮었어요. 각자 다음 행동을 하나씩 예상하고 앞선 장면에서 그 근거가 되는 말이나 행동을 찾아 적었어요. 책을 다시 펼치자 정답을 맞힌 사람보다 인물을 어떻게 읽어왔는지가 더 선명하게 보였어요.
일상 ·
냉동만두 한 알의 부엌 컬링
냉동만두 봉지를 열다 한 알이 바닥으로 떨어져 부엌을 길게 미끄러졌어요. 만두는 의자 다리 앞에서 정확히 멈췄고 저는 집게로 집어 버린 뒤 바닥을 닦았어요. 저녁 경기는 한 번의 투구로 끝났고 금메달은 의자 다리가 가져갔어요.
일상 ·
공용 식탁 한 칸을 더 닦은 사람
점심을 먹던 사람이 물컵을 건드려 자기 자리와 비어 있는 옆자리까지 젖었어요. 휴지로 자기 앞만 닦고 갈 줄 알았는데 옆 의자와 바닥의 작은 물방울까지 살피고 정리했어요. 다음 사람이 사고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게 만든 친절은 꽤 조용했어요.
일상 ·
젖은 바닥과 택배 사이의 빈 상자
공동현관에 빗물이 들어와 택배 몇 개의 바닥이 젖기 시작했어요. 옆집 사람이 주소나 이름은 들여다보지 않고 깨끗한 빈 상자를 아래에 받친 뒤 관리실에 물기를 알렸어요. 택배를 대신 옮기지 않고도 젖는 시간을 멈춘 작은 받침이 고마웠어요.
일상 ·
지금은 듣기와 해결 중 어느 쪽인가?
친구가 직장에서 힘든 일을 말하자마자 해결책 세 가지가 떠올랐어요. 바로 꺼내놓지 않고 지금은 그냥 들어주길 원하는지 함께 방법을 찾고 싶은지 물었어요. 친구가 오늘은 말만 하고 싶다고 해서 조언 대신 질문 하나와 긴 고개 끄덕임을 건넸어요.
관계 ·
사과 첫 줄에서 ‘그럴 의도는’부터 뺐습니다
제 말 때문에 회의에서 곤란했다는 동료의 메시지를 받고 의도는 그렇지 않았다고 먼저 쓰려 했어요. 그 문장을 뒤로 미루고 제가 사람들 앞에서 말을 끊어 설명할 기회를 놓치게 했다는 점부터 인정했어요. 사과는 제 마음의 해설보다 상대가 겪은 일을 먼저 읽는 순서라는 걸 배웠어요.
일상 ·
보증서 사진 이름에 제품과 날짜를 함께 썼습니다
고장 난 전기포트의 보증서를 찾으려니 휴대전화 사진첩에 영수증 사진만 수십 장이 쌓여 있었어요. 새로 찍은 사진은 ‘전기포트_구매일’처럼 제품과 날짜가 보이게 이름을 바꾸고 보증 폴더에 넣었어요. 사진을 더 많이 남기는 대신 나중의 제가 검색할 단어를 먼저 남겼어요.
일상 ·
현관 바구니가 반품 기한을 지켰습니다
반품할 셔츠를 포장해두고도 외출할 때마다 책상 위에 두고 나갔어요. 오늘은 송장이 붙은 봉투를 현관의 작은 바구니에 세워두고 택배를 맡길 날을 달력에 적었어요. 할 일을 더 오래 기억한 게 아니라 나가는 길목이 대신 기억하게 했어요.
일상 ·
반려견 접종일을 가족 달력에 옮겨봅시다
오늘 세계 광견병의 날 소식을 보고 반려견 건강수첩을 다시 펼쳤어요. 마지막 접종 기록을 확인한 뒤 다음 일정은 임의로 계산하지 않고 다니는 동물병원에 물어 가족 달력에 함께 적었어요. 누군가 기억하겠지 하던 일을 모두가 확인할 수 있는 한 칸으로 바꿨어요.
일상 ·
등장인물이 끝내 하지 못한 말을 쓴다면
소설을 읽고 각자 등장인물이 끝내 말하지 못한 문장을 한 줄씩 써봤어요. 상상으로 성격을 바꾸지 않도록 그 문장을 떠올린 장면 두 곳을 본문에서 함께 표시했어요. 같은 침묵을 미안함과 두려움, 체념으로 다르게 읽은 이유가 문장보다 근거에서 선명해졌어요.
일상 ·
목차만 보고 가장 먼 장을 골랐습니다
북클럽에서 책을 펴기 전에 목차만 읽고 자기 생각과 가장 멀어 보이는 장 제목을 하나씩 골랐어요. 왜 불편하거나 낯설게 느꼈는지 질문으로 적은 뒤 해당 장을 읽고 예상과 달랐던 문장을 찾았어요. 목차를 정답표가 아니라 선입견이 드러나는 작은 거울로 써봤어요.
일상 ·
도서관 책에서 나온 종이꽃이 주인을 기다렸습니다
반납할 책 사이에서 손으로 접은 작은 종이꽃 책갈피가 나왔어요. 버리지 않고 책 제목이나 대출자 정보는 적지 않은 채 발견한 날짜와 자료실만 메모해 안내 데스크에 맡겼어요. 다음 주에 주인이 찾아갔다는 말을 듣자 종이꽃도 잠깐 도서관 회원이었던 것처럼 느껴졌어요.
일상 ·
로봇청소기가 양말 한 짝을 출근시켰습니다
청소 완료 알림을 받고 충전대로 가보니 로봇청소기 회전솔에 양말 한 짝이 단단히 감겨 있었어요. 양말은 침실에서 거실까지 무임승차한 뒤 청소기와 함께 충전대에 도착했어요. 오늘 집에서 가장 먼저 출근한 건 저도 청소기도 아닌 왼발 양말이었어요.
일상 ·
붕어빵 봉투에 한 마리가 더 들어 있었습니다
붕어빵 세 개를 샀는데 주인이 봉투에 네 개를 담아줬어요. 계산이 잘못됐다고 말하자 앞 손님이 다음 사람에게 하나 건네달라며 미리 값을 내고 갔다고 했어요. 이름도 모르는 사람의 붕어 한 마리가 늦은 저녁을 조금 덜 춥게 만들었어요.
일상 ·
날짜보다 먼저, 이번 주 체력이 남았나요?
바쁜 친구와 주말 약속을 잡으며 전시와 저녁을 한꺼번에 제안하려다 이번 주 체력이 어느 정도인지 먼저 물었어요. 친구가 오래 걷기는 어렵다고 해서 집 근처에서 차 한 잔만 마시기로 했어요. 만남의 길이를 줄였더니 취소할 이유보다 만날 여유가 먼저 생겼어요.
관계 ·
칭찬 앞에서 변명하지 않았습니다
회의가 끝난 뒤 동료가 제 설명이 이해하기 쉬웠다고 말했어요. 평소처럼 운이 좋았다거나 자료가 별것 아니었다고 줄이지 않고 먼저 고맙다고 답했어요. 도움받은 부분은 따로 정확히 말하되 제가 잘한 몫까지 급히 반납하지 않았어요.
일상 ·
검은 가방에 노란 파우치 하나
안감까지 검은 가방에서 열쇠와 이어폰을 찾을 때마다 손으로 바닥을 한 바퀴 훑었어요. 작은 물건만 노란 파우치 하나에 모으고 늘 같은 안쪽 주머니에 넣었어요. 가방을 더 잘 정리한 게 아니라 어둠 속 물건들에게 형광 조끼를 입힌 셈이었어요.
일상 ·
세탁망에 ‘건조기 금지’ 집게를 달았습니다
세탁이 끝날 때마다 건조기에 넣으면 안 되는 니트를 젖은 빨래 속에서 다시 찾느라 한참 뒤적였어요. 오늘은 그 옷이 든 세탁망 손잡이에 빨간 집게를 달고 세탁이 끝나자 집게부터 골라냈어요. 기억력을 훈련하는 대신 빨래가 먼저 자기 행선지를 말하게 했어요.
일상 ·
멋진 전망보다 계단 수부터 적어봅시다
오늘 세계 관광의 날 소식을 보고 지난 여행 후기를 다시 열었어요. 멋진 전망만 적어뒀던 글에 입구 계단 세 칸과 엘리베이터 위치, 중간에 앉을 의자가 있다는 정보도 덧붙였어요. 좋은 여행 정보는 가고 싶게 만드는 데서 끝나지 않고 누군가 실제로 갈 수 있게 도와야 한다고 느꼈어요.
일상 ·
결말 뒤 첫 장으로 돌아간다면
소설을 다 읽은 뒤 북클럽에서 첫 장만 다시 펼쳤어요. 처음에는 지나쳤지만 결말을 알고 나니 다르게 보인 물건과 말투를 각자 하나씩 골라 앞뒤 장면을 함께 찾았어요. 복선을 많이 맞힌 사람을 뽑는 대신 같은 문장이 두 번째 읽기에서 어떻게 달라졌는지 나눴어요.
일상 ·
‘좋았다’ 없이 책 이야기를 해봤습니다
북클럽 첫 10분 동안 ‘좋았다’와 ‘별로였다’를 쓰지 않고 감상을 말해보기로 했어요. 대신 기억에 남은 장면과 인물의 행동을 하나씩 짚고 그 대목에서 어떤 느낌이 생겼는지 설명했어요. 취향을 숨긴 게 아니라 취향이 기대고 있는 본문을 함께 보여준 시간이었어요.
일상 ·
세탁소 봉투 속 천 원
맡긴 바지를 찾으러 갔더니 세탁소에서 ‘왼쪽 주머니’라고 적힌 작은 봉투를 함께 건넸어요. 안에는 제가 잊은 천 원짜리 한 장이 반듯하게 들어 있었어요. 돈의 크기보다 누군가 제 주머니까지 자기 일처럼 살펴준 마음이 오래 남았어요.
일상 ·